장혜원 (약학 ’50)

  이해경 (음악 ’50)

  이화국제재단 창단 배경

 

      1966-1967년 당시 이화대학의 이사장이셨던 김활란 박사는 ‘이화대학10년발전계획’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할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미국 내 지부는 뉴욕과 워싱톤D.C에 두기로 결정되었다. 뉴욕지역에서는 임길재 뉴욕동창회장이 ‘재미이화10년발전위원회’ 뉴욕지부의 회장을 겸임하였으며, 동창회 주요 임원들과 이화 사위들이 함께 ‘재미이화10년발전위원회’의 위원들이 되었다. 그들은 이범선, 이향원, 허장운, 주영빈, 장혜원, 임순만, 김희수, 한명숙, 이해경, 이인옥 등 이었다. 1968년, 김활란 박사는 East 57가에 있는 친구 집에 몇 달간 머무시면서, 이화10년발전계획의 일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국제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셨다. 그 때 10여명의 동창들이 방문을 하자, 김활란 박사는 “이제는 뉴욕에 이화대학의 졸업생들이 꽤 많아졌으니, 학교를 위해 모금활동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1968년 초여름, 김활란 박사가 국제재단 설립에 협조를 해 줄 Harry Denman 박사를 위시해 이화의 미국인 친구들과 앞으로 국제재단에 참여할 멤버들을 규합하고 계실 때, 뉴욕한인교회 친교실에서 회의를 가진 일이 있었다. 이 때 당시 동창회장 김복희 (음악, 49)와 여러 동창들(임길재, 장혜원, 홍진표 씨의 부인, 김명제, 허장운, 박찬임 등)이 참석하여 점심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하면서, 뉴욕 동창들은 이 일을 적극 도왔다.

 

      뉴욕지역이화대학동창회의 모금을 위한 첫 번째 자선무도회(Dinner Ball)는 1969년9월 20일, New York Sheraton Hotel (7th Avenue 56 St.)에서 열렸다. 이 자선무도회의 명예준비위원장은 김활란 박사, 김용식UN대사 부부, 정규섭 뉴욕총영사 부부였으며 범 뉴욕교포들을 대상으로 초청장이 나갔다. 만찬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일인당 $10의 티켓 판매금과 더불어 많은 후원금이 들어와, 약 $7,000의 수익금이 이화10년발전계획기금으로 전달되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한 액수였다.

 

      이렇게 결성된 “이화대학10년발전계획위원회”는 이후, 해방 후부터 이화대학을 돕던 미국인/캐나다인 후원단체인 “Ewha Cooperating Board in North America”와 합병하여, 1970년 4월 15일에 새로 “이화대학국제재단, The International Foundation for Ewha Woman’s University, Inc.”을 발족하였다. 이 이화국제재단의 설립과정에 뉴욕의 이화대학동창회는 정성껏 힘을 보탰다.

 

      김활란 박사는 이화의 동창들과 친구들을 결속시키고자 1968-1969년에 걸쳐 뉴욕 뿐 아니라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이화발전 10년계획을 널리 알리며 건강에 무리가 갈 정도로 혼신을 기울여 일하셨다. 결국 1969년 12월 20일에 아픈 몸으로 뉴욕을 떠나 귀국하셨으나, 봄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시고 두어 달 후인 1970년 2월 10일에 서울 자택에서 영면하셨다. 그리도 원하던 국제재단의 발족 두 달을 앞둔 때였다. 뉴욕지역이화대학동창회에서는 1970년 2월 28일에 고 김활란 박사 추도식을 갖고, 고인을 추모하며 생전 업적을 기렸다.

 

 

 

      이해경 (음악, ’50) 회장 당시, 1971년 5월 22일에 김활란박사의 1주기를 기념하면서 “Dr. Helen Kim Memorial Medical Center”를 위한 자선무도회(Benefit Ball)을 뉴욕의 Park Sheraton Hotel에서 열었다. “Baba Originals”의 패션쇼를 곁들인 이 행사는 성공적으로 치러져, 수익금 중 뉴욕이화동창회에 $352를 남기고, 총 $5,035에 이르는 기금을 이화대학으로 보냈다. 이때부터 Benefit Ball (자선만찬)이 동창회의 친목 도모와 모금방법으로 적합하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져, 후에 뉴욕동창회의 연례 행사가 되었다.

 

      1972-1977년에는 뉴욕의 동창 수가 많지 않아서, 뉴욕동창회 자체의 행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주로 이화대학의 김옥길 총장님이 이화대학 국제재단 이사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하시는 것을 계기로 회의 장소였던 York Club에서 하루 저녁 국제재단이사들과 함께 모여 총장님 환영을 하며 모교 소식도 듣고 학교를 돕는 일도 하곤 하였다. 동창회가 독립적으로 연례만찬을 개최하고 국제재단 이사들을 초청한 것은 1979년 장한희 (기독, ’53) 회장 때부터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이화대학 동창의 수가 많이 증가함에 따라, 거의 매년 연례만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모은 기금을 바로 모교로 보내는 대신, 일부는 이화국제재단에 기금으로 설립하여 국제재단이 그 기금을 관리하고 키움으로써 빠른 시일 내에 더 큰 기금이 되어 그 수익금으로 모교의 후학을 돕자는데 의견이 모아 졌는데 명광애 (약대, ’50) 회장 당시의 일이다. 그리고 이 기금을 빨리 늘리는 방안으로 1983년에 동창회의 회칙을 바꿔 이사회제도를 도입, 이사회비를 연 $50으로 정했다. (사진 8-1, 8-2, 8-3) 초대이사장으로 장혜원 (약학, 50)이 선출되어 이사회를 조직했는데, 1983-1984년, 2년 동안에 2명의 고문과 42명의 이사로부터 $4,400을 걷어 전액을 이화국제재단의 ‘뉴욕동창회장학기금’에 넣었다. 이후 2년마다 선출되는 이사장과 동창회장 및 임원진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더욱 성공적으로 동창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장혜원 (약학 ’50), 이해경 (음악 ’50)